편싸움 1편

편싸움(석전)


인왕산(仁旺山)이 무악재毋岳峴)를 가로질러 무악 봉우리를 우뚝 점 찍어놓고, 다시 남쪽으로 줄기를 뻗어 추모현(追慕峴), 약재(藥峴), 애오개(阿峴), 만리재(萬里峴)의 기복을 누비다가, 한 줄기는 한가람 기슭에 이르러 벼랑을 이루어, 읍청루(挹淸樓)아래 물결에 씻기고, 또 한 줄기는 만초천(蔓草川)에 이르러 당고개〔堂峴〕 이름을 남기고는 흐지부지 잦아들어버린다.

이 무악 산줄기는 한양성(漢陽城) 서쪽 성채(城砦)와 더불어 평행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자연성(自然城)을 이루고 있다. 한양성의 서쪽 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남쪽 소문 소의문(昭義門), 남쪽 대문 숭례문(崇禮門)의 3문 가운데 어느 문을 나서거나 우선 마주치는 산줄기가 바로 인왕산 줄기인 것이다.

성 밖 삼개(麻浦), 용산(龍山) 사람으로서 문 안에 들고 날 때엔 반드시 이 산줄기를 넘어야 했다. 애오개, 만리재(큰고개)는 그래서 생긴 고갯길이다. 이 애오개와 큰고개를 잇는 산줄기를 내려선 무당개울을 사이에 두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 3문 밖 애오개 패거리와 삼개, 용산, 강대(江帶) 떨거지가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처음에는 서로 돌팔매질을 퍼붓다가 점점 흥분하면 몽둥이질로 육박전을 벌여 생사를 분간 못하는 무시무시한 승부를 겨룬다.

이것을 석전(石戰) 또는 편을 갈라 겨룬대서 편싸움이라고 한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특유의 연중 행사 놀이였지만, 하나의 놀이로서나 스포츠로서는 실로 살기등등한 격렬한 싸움이었다.

"우우우 워어 - "

"휘이 휘이 휘이—”

산과 산. 봉우리와 산마루에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서서 펑퍼짐한 구릉을 사이에 두고는 서로 함성으로 을러메긴다. 지난 밤 눈발이 흩날렸는가, 산줄기엔 하얗게 눈이 깔렸다. 아득한 세월이 새겨놓은 숱한 사연을 자차분히 덮씌운 새하얀 눈길을 거칠게 밟고 간 미투리 짚신 자국이 만리재 쪽 봉우리와 애오개켠 산마루에 수없이 널려 있었다.

"애오개 촌놈 상것들아! 육시처참을 당하기 전에 삼십육계 줄행랑이나 놓아라.”

3문 밖 패거리 편에서 먼저 욕설을 퍼붓고 돌팔매로써 싸움을 걸었다.

“꼴래라 꼴래꼴래! 문 밖 하인배 상놈들아! 어쭙잖은 소리 마라. 금방 아가리가 쭉 찢어질라."

애오개 떨거지 편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마주 욕설을 퍼부으며 줄팔매를 던져 대항한다.

줄팔매는, 물매끈이나 대님 같은 끈을 두 겹으로 접어, 고에 돌멩이를 끼우고 두 끝을 손에 쥐고 휘두르다가, 줄 한 끝을 후딱 놓으면서 돌을 날려보내는 팔매질이다. 또는 대님 한 끝에 돌멩이를 붙잡아매고 다른 한 끝을 쥐고 팔을 앞에서 뒤쪽으로 돌리면서 휘두르다가, 대님째 휙 날려 보내는 팔매도 줄팔매이다. 이 줄팔매는 맨손 팔매보다 돌멩이가 엄청 센 기세로 훨씬 멀리 날아간다.

애오개 편 줄팔매에 문 밖 패거리 가운데 어떤 놈이 된통으로 이마빼기를 맞아 “어이쿠!" 소리도 못 지르고 나자빠지더니, 그대로 까무러쳐버렸다. 그 녀석 이마빼기에서는 살갗이 까져 피가 송송 솟아흘렀다.

지금까지 산과 산의 간격을 두고 성긴 빗방울처럼 돌멩이가 교차하던 양쪽 편에서는, 이제금 약이 바싹 올라 좀더 거리가 좁혀지면서 더욱 고약한 욕설과 소나기 쏟아지듯 줄기찬 팔매질로 격돌했다.

"덤벼라! 성밖 XX놈들 씨알머리를 없애겠다.”

애오개 편 수령인 굴레방다리 개고기 박개동(朴介童)이 큰소리치면서 주먹만한 돌을 팔매질했다.

양쪽편 거리는 200보로 좁혀지고, 다시 150보 상거로 가까워졌다. 서로 돌팔매질을 하되 겨냥을 댈 여유조차 없다. 조약돌이 갈까마귀떼처럼 날아오는데, 이쪽에서도 연방 쉬지 않고 돌팔매를 날린다.

"헉!"

“어이쿠!"

“으윽!"

돌팔매에 박(이마빡)을 맞은 놈은 영락없이 터진 데를 움켜잡고 고꾸라진다. 돌멩이로 눈통을 정통으로 맞은 놈은 눈알이 빠져 껑충껑충 뛰다가 자빠져서 허우적거린다.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벌써 수없이 꽃잎처럼 무늬를 지었다. 그럴수록 싸움은 치열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것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사람마다 눈에서는 확확 불이 일었고, 상대편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자기가 비참하게 거꾸러진다는 살기(氣)만이 팔팔했다.

싸움이었다.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강대사는 XX 상놈들아, 육모방망이 맛이나 톡톡히 봐라! 올릴 놈은 을러라!"

수건으로 질끈 동인 머리에다 검은 테를 두른 벌벙거지를 눌러쓴 성 밖 패거리의 두령(頭領)인 무당개울 털보 김억돌(金億乭)이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내닫는다. 뒤따라 아우성이 터졌다. “때려라!"

"잡아라!"

"박살내라!"

애오개 편에서도 두령 박개동이 넉 자짜리 참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앞장서서 덤벼들었다. 애오개 쪽 마포, 용산, 강대 떨거지는 흰 무명 풍채 위에다 수건을 둘러매고 두루마기를 젖혀서 입었다. 이제는 돌팔매를 할 여지조차 없었다. 몽둥이로 때려잡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탁! 딱!

“아유유! 으크크!”

퍽! 뚝!

"으윽! 캑!"

쓰러지고, 자빠지고, 고꾸라지고, 동그라지고, 나가떨어지고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놈, 버둥거리는 놈, 뒤채는 놈, 엉금엉금기는 놈, 내빼는 놈....... 선혈이 백설을 녹여서 물줄기를 이룬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아우성 소리는 그래도 그치지를 않는다. 어느 한쪽 편이 목숨을 살려 달아나기 전에는 이 싸움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편 저편으로 갈라진 서울의 편싸움은, 돌팔매질로 시작하여 몽둥이질, 발길질, 주먹질로 절정을 이루어, 마침내 피를 흘리는 무시무시한 놀이였다.

조약돌을 손으로 던지는 팔매질을 놀이로 행한 것이 척석희(擲石戱)이다. 이 척석희를 하되 편을 갈라 서로 승부를 다투게 된 것이 석전(石戰)이었다. 석전은 나중에 몽둥이로 때리는 무서운 싸움으로까지 번져서 서울에서는 편싸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 사람이 활이나 칼 같은 무기를 발명하지 못했을 때에는, 돌멩이를 주워서 힘껏 던지면,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떨어뜨려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돌팔매는 사람이 최초로 발명한 무기였을 것이다. 이 돌팔매가 단체적 놀이로서 고구려 때에 행해진 기록이 《수서(隋書)》동이전(東夷傳)에 보이고, 신라에서는 석당(石投幢)이라는 돌팔매질하는 군대가 조직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있다.

고려 때에도 석투반(石投班), 석투군(石投軍)이라는 돌팔매질 군대가 있었으며, 조선왕조 때에 태조(太祖)가 돌팔매 선수를 모아 척석군(擲石軍)을 만들었고, 중종(中宗) 때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돌팔매 선수를 모집해서 왜인을 굴복시켰다. 또한 임진왜란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에서도 돌팔매로 개미떼처럼 몰려온 왜병을 번번이 무찔렀던 것이다.

이렇듯 돌팔매가 전투(戰鬪)의 기술로 활용되었으나, 조총(鳥銃)이 등장한 뒤부터는 전연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신우왕(王)이 석전 구경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척석희(擲石), 석전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며, 예종(睿宗) 1년 5월에는 서울 장안 사람람들이 사장(場)에 모여 훈련하는 것을 보고 나서 돌팔매질 놀이를 벌였는데, 여염집 아가씨와 아낙네들도 다투어 이를 구경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서울에서는 편싸움 장소로 만리재(큰고개)와 우수재가 기록에 있고, 이 밖에 남대문 밖의 굴개(지금의 봉래동과 서울역 일대), 서대문 밖 녹개천(지금 마포가도의 신공덕동 부근), 동대문 밖 무당개울, 문 안으로는 하남촌조산(村造山: 지금 청계천6가) 편싸움이 유명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서울 3문 밖 편싸움 기록이 있다. “3문(남대문• 서소문 • 서대문) 밖 및 애오개 사람들이 떼를 이루어 편을 가른 다음, 혹은 몽둥이를 들고 혹은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달려들어 접전하는 모양을 만리현(萬里峴) 위에서 행한다. 이것을 변전(邊戰:편싸움)이라 한다. 그리하여 패주하는 편이 지는 것이다. 속담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기내(畿內:경기도 안)가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다른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에 용산과 마포의 불량소년들은 작당하여 아현 쪽을 돕는다. 그것이 매우 심한 싸움일 때에는 고함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는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고 하여 피를 보고서도 그치지 않는다. 비록 사상(死傷)에 이르러도 후회하지 않고 또 생명에 대한 보상법도 없다. 그러므로 관청이 이런 싸움을 못하도록 금지해도 고질이 된 악습이 온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그 후 성 안의 아이들도 이를 모방하여 종가(街: 종로 네거리)와 비파정(종로구 관수동에 있던 정자) 등에서 편싸움을 했으며, 성 밖에서는 만리현과 우수(雨水峴:桃洞에서 厚岩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이 편싸움하는 곳이 되었다."

《경도잡지(京都雜誌)》 기록은 다음과 같다.

"3문(서대문· 서소문 · 남대문) 밖과 애오개 사람들은 돌팔매로써 만리재 위에서 맞싸운다. 흔히 말하기를, 3문 밖이 이기면 서울 부근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가 이기게 되면 다른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용산 및 마포 사는 젊은이들 건달패가 떼지어서 애오개 편을 돕는다. 한창 어울려 싸울 때에는, 아우성 소리 땅을 뒤흔든다. 이마가 깨어지고 어깻죽지가 부러진대도 또한 원망하지 못한다. 관청에서는 이따금 금지시켰다. 문 안에서도 무리를 이룬 아이들이 이를 배워 돌팔매로써 편싸움을 한다. 길 가는 사람은 날아오는 돌이 무서워서 한결같이 피하게 된다. 《당서(唐書)》고구려전에 보면, 해마다 정월에 대동강 위에 모여 노닐되, 물을 뿌리고 돌로 팔매질하여 상대방을 쫓고 쫓기를 서너 번 하다가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석전(편싸움)의 시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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